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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양귀자, 모순
    감상하자 2025. 1. 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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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읽은 책 뒤늦은 기록.

    공감되는 안진진의 생각들, 써먹어 보고 싶은 표현들,

    다이나믹한 전개 등 오랜만에 재밌게 읽은 책.

     

    풍요와 빈곤, 행복과 불행, 정신과 육체, 삶과 죽음.

     

    하나의 개념에 필연적으로 잇따르는 반대어,

    이것을 '일란성 쌍둥이'라는 소재로 이야기를 풀었다는 게 감탄이 나왔고

    제목 또한 정말 잘 지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을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량한 것임에도.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그런데 나는? 스물다섯 해를 살도록 삶에 대해 방관하고 냉소하기를 일삼던 나는 무엇인가. 스물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나,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나,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 보내고 있는 나.

     

    그런 깨달음이 언제부터인가 아주 조금씩, 마치 실금이 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 그렇게 조금씩 내 마음을 적시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항아리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물은 걷잡을 수 없이 새들어오고, 마침내 마음자리에 홍수가 나버려서 이 아침 절박한 부르짖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나는 똑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왜 이다지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만 삶에 대한 다른 호기심까지도 다 거두어버렸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원인을 분석한다고 때로는 문제가 있는 가정에, 혹은 사회에, 아니면 제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분석들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방송을 정당화하려는 젊은 애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교활함을 참을 수 없어한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 한다.

     

    나의 인생에 있어 '나'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존재였다. 나라는 개체는 이다지도 나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 꼭 부끄러워할 일만은 아니라는 깨달음.

     

    '언제나 최고의 셔터 찬스는 한 번 뿐, 두 번 다시는 오지 않는다. 좋다고 느껴지면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셔터를 누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훌륭한 순간 퐃ㄱ, 그곳에 사진의 진가가 존재한다.'

     

    "안진진. 인생은 한 장의 사진이 아냐, 잘못 찍었다 싶으면 인화하지 않고 버리면 되는 사진하고는 달라. 그럴 수는 없어."

    하긴 그랬다. 사진은 정지된 하나의 순간이고, 인생은 끝없이 흘러가는 순간순간들의 집합체인 것을, 멈춰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지금 그가 품고 있는 나에 대한 사랑의 부피가 감소될 어떤 말도 절대 하고 싶지 않다.

    사랑의 유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이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

     

    그 장렬한 비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누추한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존재였다. 부끄러움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그토록이나 오래 기다려온 사랑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지 않다. 저 바다가 푸른 눈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는 더욱.

     

    이모와 나 사이에서 통용되는 화법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

    이모는 지금 사진만 있고 추억은 없는 이모부를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모의 넘쳐나는 낭만애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란 존재의 한없는 모순.

     

    추억 속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현실 속의 내 아버지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내 추억을 희롱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여태 기다렸는데, 이건 부당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머니와 이모는 한 몸이었다. 한 몸의 두사람이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살았던 것이었다. 한 쪽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 나는 어머니의 슬픔을 이해했다.

     

    하늘은 내내 음울했고 겨울 끝의 찬바람은 한없이 모질었다. 내 머릿속은 모래를 가득 채운 것처럼 부석부석했고, 먹먹한 가슴 한 켠으로 쉼 없이 이모의 편지 구절들이 흘러내렸다.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순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죽기 전에는 아무도 인생의 보잘것없는 삽화들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크고 작은 액자 안에 우리의 지나간 시간들을 걸어놓으며 앞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얼마 전부터 나는 이런 식의 서로 상반되는 단어들의 조합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하나의 개념어에 필연적으로 잇따르는 반대어, 거기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곡절을 보편성으로 풀어 쓰는 직업이 작가 아니겠냐고 홀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모순'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었다. 그랬으므로 이 소설에 쌍둥이가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단 한 번뿐인 이 삶, 한 사람을 놓고 두 개의 상반되는 삶을 추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인 인생 궤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란성 쌍생아보다 더 적합한 장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우리들 모두, 인간이란 이름의 일란성 쌍생아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각, 생김새와 성격은 다르지만, 한 번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였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모순'은 무엇을 따라도 모순의 벽과 맞닥뜨려지는 인간과 삶에 관한 진술이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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