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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교양] 천영준, 어른의 교양감상하자 2024. 6. 6. 17:56728x90반응형
각 철학, 예술, 역사, 정치, 경제 분야의 30인들의 삶에서 찾은 생각 프레임을 읽고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어떤 생각이 필요로 하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산해내는 '지적 독립'으로 부터의 '삶의 문제해결'을 위해 이 책을 읽어보고자 한다.
나의 판단은 과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랜 세월 동안 주입된 가치와 경험을 재탕, 삼탕하고 있진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집단 기억에 의존해 마구 떠들고, 일이 벌어진 후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나 남다른 사고를 할 줄 아는 지성인은 생산적 의심을 할 줄 안다고 한다.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책임의식 때문이다.
여기서 생산적 의심이란 무엇일까? 내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알고있는 것에 끊임없이 의심하며 본질에 대해 다가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생산적 의심을 연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소크라테스의 해법은 '대화'라고 한다. 서로가 어떤 가정이나 전제도 없이 솔직하게 주장을 교환하며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읽으며 울림이 있었던 부분. 대화가 계속해서 이어지려면 상대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존중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것을 '티메(time)'라고 불렀다. 누군가에게 깊이 매료되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감정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말하는 사람의 자세에 '아레테(arete)'가 있어야한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소크라테스는 대화하는 사람들과 함께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노력했다. 아레테에 대해 제자들은 티메로 보답했다. 대화의 과정에 인격적 겸허함과 차분함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그저 그런 철학 교사 내지는 멘토를 흉내 내는 사람 정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오래된 경험을 참된 답이라고 여기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질문할 줄 아는 사람을 불온하다고 탄압하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집단이 만들어낸 '대사'와 '멘트'에 불과한 것을 답으로 여기는 사람은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인형일 뿐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마켓을 다녀오고 느낀게 있었다. 마켓 광장에는 엄청 큰 트리가 설치되어있었고, 트리 중앙에 빨간 십자가가 달려있었는데 그게 불편했다. 평소 나는 크리스마스는 좋아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엄청 커서 눈살을 찌푸렸던것 같다. 생각해보면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날이라 십자가가 달려있는게 틀린게 아닌데도 말이다.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왜 기독교를 싫어하는지도 정리해본 계기가 되었는데, 그 정리가 저 내용과 일치했다.
신앙을 강요하고, 본인의 수입 10분의 1을 하느님의 은혜와 교회 지원 목적으로 납부하는 십일조, 사회 문화 권력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집단 조직의 모습 때문에 반감이 컸던것 같다.
끊임없는 상승욕은 온전한 자신의 욕망이 아니다. 타인과 나의 비교를 통해 만들어진 상대적 욕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남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관계를 통해 성장하는 존재이지만, 타인과의 비교 연결, 경쟁에 함몰되면 매우 추악하고 볼품없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그 상태에 놓일 수 있고, 그 과정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 착각해버릴 수도 있다.
상승욕을 성취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한다. 나는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가치를 정립하려는 의지와 힘이 있는가? 일체의 가식이나 허위를 거부하고 나의 근본 욕구만 바라볼 자신이 있는가? 등의 본인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반복해서 물어야 한다.
행복은 무한한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 이루어지는 많은 행위 가운데에서 얻어지는 작은 감정들의 집합체일지도 모른다.
이 구절을 읽으니, 몇몇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의 삶이 고달픈 이유는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고 소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지 사회적으로 툥용되는 삶의 모습을 그럴 듯하게 실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다. 삶의 기준은 남에게 두고 그런대로 잘살고 있다고 자위하려니 인지 부조화가 생기고 마음이 괴롭다.
우리는 삶의 진가를 얼마나 깊게 느끼고, 맛보고 있을까. 바쁘게만 사는 사이에 인생 자체가 훌륭한 예술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거대한 목표와 성과도 중요하지만, 찰나의 행복감과 기쁨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내가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 별일 아닌 삶의 순간들과 그 때 그 시기에 생각했던 것들을 짧게 나마 기록하고 되돌아보는,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과거의 나를 보며 성장했구나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클림트는 남들이 자신을 정의하기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정의하며 시대를 박차고 나아갔던 예술가였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로부터 격하당해도, 견디기 힘든 갈등을 겪게 되어도 그 또한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긍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살면서 누구나 조금씩은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망을 갖지 않는가. 그러자면 스스로를 논란의 중심으로 몰고 갈 줄도 아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주위의 비난보다 나다움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외부의 기준에 예민한 사람들은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자기 존재 가치를 깨닫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진정 삶의 주인인 사람은 무엇인가를 얻고 나면, 아주 잠깐 동안만 즐기고 그 다음으로 나가는 버릇이 들어 있다. 그렇다고 편안하게 살지 말라거나 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얻은 성과와 기득권에 취하지 말고 새로운 지향점을 볼 줄 아는 눈을 키우자는 것이다.
하부 구조론(Unterbau), 사회주의 사상을 이끌었던 마르크스는 계급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이 인간의 모든 행동을 좌우한다고 주장한다. 매우 거시적이고 거친 설명 방식이었다.
베버가 주장하는 상부 구조론(Uberau), 정신 문화적 배경이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고, 부를 축적하고 국가를 살찌우는데에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보다는 훨씬 유연하고 다양한 학문의 틀을 접목해 사회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다.728x90반응형'감상하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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